유럽의 미래 농업은 그린딜과 함께 결실 맺을 수 있을까? 관련 KDI 경제정보센터에서 발간하는 월간 '나라경제 12월호, 세계는 지금' 코너에 기고된 내용입니다.
지난 6월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연초부터 프랑스, 스페인, 벨기에 등 유럽 전역에서 대규모 농업인 시위가 벌어지며 선거판을 뒤흔들었다. 농업인들은 EU의 농업정책에 반발해 지난 1월부터 도로의 표지판을 거꾸로 뒤집어 걸고 트랙터로 도로를 봉쇄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EU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의 EU 지구에는 900여 대의 트랙터가 집결해 일대가 마비되기도 했다.
농심 되돌리기 위해 농업정책 개편 서두른 EU
무엇이 유럽의 농업인들을 극렬한 시위로 내몰았을까?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원인이 있다. 먼저, EU의 과도한 환경 규제와 보조금 수급에 수반되는 복잡한 행정 절차에 대한 불만이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지난 정권부터 그린딜(Green Deal)을 최우선 정책 목표로 두고 사회 전 분야에서 지속 가능한 전환을 추진해 왔다. ‘2050년까지 탄소배출 제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농업 분야에서도 농약, 비료, 항생제 사용 감축과 함께 직불제 개편이 진행됐다. 집행위가 2030년까지 화학 살충제 사용 50% 감축을 골자로 하는 ‘지속 가능한 살충제 사용 규제(SUR; Sustainable Use of pesticides Regulation)’ 발의를 제안하고, 농업 직불금 수급 조건으로 농업인들에게 일정 면적에 대한 휴경 의무를 부여하는 등 환경적 조건을 강화한 것이 대표적인 정책이다. 농업계는 이러한 정책이 식량안보를 해치고 농가 생계를 위협한다며 크게 반발해 왔다.
둘째, 팬데믹 이후의 인플레이션에 더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초래된 생산비 상승이다. 원자재 가격 상승과 인력 부족 등으로 비용은 증가했지만 농업인들이 받는 가격은 이를 반영하지 못하면서 식품 사슬에서 농업인에게 공정한 지위와 가격을 보장해 줄 것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EU 주요 국가들이 농업 분야의 면세유 혜택 폐지를 진행하자 농업인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마지막으로, 시장 개방과 수입 농산물 유입 확대에 따른 위기감 고조다. EU가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에 자율무역조치를 취하면서 추진한 수입 관세 및 쿼터 면제가 길어지자 수입이 증가하고 폴란드, 헝가리 등 우크라이나 인접국의 농산물 가격이 하락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여기에 EU가 추진 중인 메르코수르(MERCOSUR, 남미공동시장)와의 FTA 협상이 타결되면 EU산 농산물의 경쟁력이 더욱 약해질 것이라는 위기의식 또한 높아졌다.
이러한 농업인들의 불만을 선거 공약에 이용해 EU 주요 회원국에서 극우 정치세력이 선전할 가능성이 커지자, 폰 데어 라이엔 집행위원장이 속한 유럽국민당(EPP)은 농업인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 행정부담과 규제를 완화하는 농업정책 개편을 서둘렀다. 지난 2월에는 ‘지속 가능한 살충제 사용 규제’ 발의 제안을 철회했고, EU의 온실가스 감축목표 발표에서는 농업 분야 목표가 아예 제외됐다. 환경 규제와 연관된 직불금 수급 요건을 일부 완화하거나 현장점검 횟수를 감축하는 등 불필요한 행정 절차도 줄였다. 또한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에 대한 자율무역조치를 연장하되, 시장 교란이 우려될 경우 집행위가 필요한 조치를 하도록 하고 주요 품목에는 예외 규정을 두는 등 시장에서 수입 농산물의 영향을 줄이기 위한 대응책도 마련했다.
즉각적이고 단기적인 조치뿐 아니라 농업과 식품 시스템의 중장기 비전도 함께 모색됐다. 폰 데어 라이엔 집행위원장은 농업인들의 시위가 거세지던 지난 1월 ‘EU 농업의 미래에 관한 전략대화(Strategic Dialogue on the Future of EU Agriculture)’의 출범을 직접 제안했다. 이 전략대화에는 농업계, 소비자, 농촌 커뮤니티, 유통업계, NGO 등 농식품 가치사슬 전반에 걸친 다양한 이해관계자 29명이 참여했고, 약 8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올해 9월 최종 보고서가 발표됐다. 전략대화는 EU 농업·식품 시스템의 경쟁력, 회복력,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한 해결책 제시에 초점을 두고 있다. 주목할 점은 생산부터 소비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지속 가능한 방식과 선택을 촉진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 권고가 제시됐다는 것이다.
지속가능성을 지향함에는 변함이 없지만 전략에서는 많은 변화가 관찰됐다. 이전과 달리 규제보다는 인센티브와 농업 경쟁력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는 현장의 수용성을 높이고 참여를 촉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폰 데어 라이엔 집행위원장은 보고서 발표 당일 브리핑을 통해 기후변화 해결의 잠재력을 가진 농업과 농업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환경과 경제적 지속가능성의 확보를 보다 효율적인 방법으로 지원하는 것이 차기 정부 농업정책의 주요 방향일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다만 이에 대해 환경단체에서는 EU 그린딜 정책이 후퇴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기존 정책 속도와 규제를 유지해 농업의 지속 가능한 전환을 속도감 있게 추진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소비자 측면에서 흥미로운 점은 식물 기반 소비를 촉진하기 위한 정보 제공과 혁신을 지원할 것을 권고한 점인데, 이는 축산 분야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수입 농산물과의 경쟁에 대응한 통상정책 변화 주목
한편 농업인들의 큰 불만 중 하나였던 수입 농산물과의 경쟁 확대와 관련해 통상 분야의 변화도 주목할 부분이다. EU는 경제안보가 점점 중요해지는 통상환경 속에서 글로벌 표준을 제시하는 규범 제정자로서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공급망 실사 지침 등 여러 방면에서 규제 강도를 높이고 있다. 농업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농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 EU의 강도 높은 환경, 건강, 인권 관련 규범을 대EU 수출국 농산물에도 동일하게 적용하는, 소위 ‘거울조항’을 통상전략으로 표출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예는 목재, 고무, 소, 카카오, 팜유 등이 산림의 전용이나 황폐화를 초래하지 않고 생산됐다는 것을 입증하는 경우에만 EU시장에 수출될 수 있도록 하는 「산림전용방지규정(EUDR)」이다. 당초 올해 말 시행 예정이던 이 규정은 원활한 전환 지원과 이해관계자들의 준비를 위해 1년 연기될 것으로 전망되지만, 목재·고무·식품 산업계의 공급망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관련 기업들의 철저한 준비와 대응이 필요하다. 「산림전용방지규정」 외에도 동물복지 강화, 식품 라벨링 규제 등이 농식품 분야의 무역장벽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EU 농업의 미래에 관한 전략대화에서는 무역정책을 활용해 국제시장에서 EU와 동일한 수준의 지속 가능한 농업 관행을 촉진할 필요가 있다는 정책 권고가 제시된 바 있고, EU 농업인 단체도 농식품 수입국에 대해 EU와 동일한 규제환경을 적용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처럼 무역 협상에서 농식품의 통상전략적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만큼, 한국 정부와 관련 기업의 철저한 대비가 있어야 성장 잠재력이 높은 EU시장에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식량안보, 동물복지정책 강화 전망···
공동농업정책(CAP) 방향과 예산 변화도 화두
올해는 유럽의회 선거와 맞물려 새로운 집행위가 출범하는 해다. 폰 데어 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지난 9월 26명의 집행위원을 지명했는데, 이들의 직책과 임기 중 부여된 임무편지(mission letter)에서 집행위의 분야별 정책 방향을 엿볼 수 있다. 농식품 분야에서도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보인다.
먼저, 농업·농촌 집행위원의 직책이 농업·식품(agriculture and food) 집행위원으로 바뀌고, 임무편지에서는 식량안보와 자급에 관련된 업무가 강조됐다. 따라서 기후변화와 지정학적 불안이 커지는 상황에서 공급망 관리 등 식량안보를 강화하기 위한 정책이 우선순위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농식품 공급 사슬에서 농업인들이 공정한 지위와 소득을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임무와 함께 대농보다는 중소농 그리고 환경친화적 농업 관행을 수행하는 농업인에 지원을 집중하라는 임무가 눈에 띈다. 한편 식품 안전을 담당하는 보건 집행위원의 경우 보건 및 동물복지(health and animal welfare)로 직책명이 변경됐는데, 동물복지가 직책명에 포함된 경우는 처음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동물복지정책이 보다 중요해지고 관련 정책이 강화될 것이라는 점을 전망해 볼 수 있다.
차기 공동농업정책[post-2027 CAP(Common Agricultural Policy)]의 방향과 예산 변화도 화두다. 최근 개최된 EU 농수산이사회에서는 경쟁력 있고 위기를 방지하며, 지속 가능하고 농업인 중심이며, 지식에 기반한 농업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방향으로 CAP를 개편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집행위는 농수산이사회의 방향과 EU 농업의 미래에 관한 전략대화의 결론을 반영해 차기 집행위 임기 첫 100일 이내에 농업정책 로드맵을 발표할 계획으로, 관심 있게 지켜볼 부분이다.
한편 CAP 예산을 둘러싼 감축 논쟁은 계속해서 진행 중이다. 올해 브뤼겔 연구소의 연례회의에서는 차기 EU 예산 배분을 논의하면서 예산의 33%를 차지하는 CAP 예산의 감축 필요성이 언급됐다. 한때 EU 예산의 70% 이상을 차지하기도 한 CAP의 예산 비중은 현재 상당히 줄어들었으나, 환경과 안보에 대한 투자나 혁신 등 EU의 우선순위를 고려한 재정 분배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짐에 따라 EU 공통 예산은 감축하고 개별 국가의 부담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어질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EU는 농업 및 농촌 부문 지원의 재정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농업 보조금과 유럽 지역 결속기금을 통합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새로운 EU 집행위가 현장의 수용성과 집행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농업 부문의 지속 가능한 전환을 이끌어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농업인들이 올해 겨울과 내년 봄, 임기 시작 100일 이내에 제시될 집행위의 농업 비전을 수용해 더 이상 시위를 이어가지 않을지도 궁금한 부분이다.
예측하기 어려워지는 기후변화, 통상정책 환경 변화 속에서 지속 가능한 전환은 우리나라 농업정책과 현장에서도 풀어나가야 할 주요 과제다. 규제, 보조금, 통상정책 등 다양한 정책 결합을 활용해 농업 부문의 환경적 지속가능성과 경제적 성과를 조화시키려는 EU의 정책 경로는 공익직불제 개편 등을 추진해 온 우리나라에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또한 우리보다 논의가 앞서 있는 동물복지, 공급망 실사 규정, 식품 라벨링 등 통상정책에서 농식품 분야를 적극 활용하려는 움직임들은 앞으로 산업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면밀히 모니터링해 농식품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대응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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