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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문

[관훈토론회 연설]탈냉전시대의 우리 외교의 과제

작성일
2006-11-21 17:39:01
조회수
4966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환경의 변화)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국제정세는 19세기 구한말 이후 가장 유동적이고 복잡하며 불확실한 상황을 맞고 있으며 이는 한국외교에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시작된 유럽에서의 동서간 냉전체제의 와해는 유라시아 대륙을 넘어 동북아의 국제질서에도 본질적인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한국의 국력 신장, 중국의 급속한 부상, 일본 경제의 침체, 러시아 영향력의 상대적 퇴조 등이 동북아 역내 역학관계 재편의 원동력이 되고 있으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역학관계의 재편이 냉전시대의 이념적 paradigm을 벗어나 전략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한반도가 이러한 역내 강대국간 전략적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중심 축에 서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동서간 냉전의 종식과 함께 우리나라는 러시아, 중국과 수교함으로써 우리의 외교적 지평은 북방으로 확대되었고 이들과 호혜적 실질관계를 꾸준히 발전시켜 온 결과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 일본과 함께 이제 우리의 중요한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탈냉전시대의 외교적 도전과 기회)

냉전시대의 이분법적 양극체제하에서 한반도의 국제질서는 "정치적 힘(군사력을 포함한)"의 체제였으며 동서간 이념 대결의 최전방에 위치한 한국으로서는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순탄하게 관리하여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외교의 소임을 대부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탈냉전시대에는 동북아 질서가 19세기의 세력균형체제로 되돌아감에 따라 우리가 상대해야 할 player도 많아졌을 뿐 아니라 관리해야 할 국익의 범위도 대폭 확대되고 그 구조와 성격도 복잡 다기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한반도를 둘러싼 전략적 상황에도 불확실성이 증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대적 국력과 국제적 위상은 냉전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향상되어 우리의 외교적 역할에 대한 국제사회의 기대는 높아지고 있습니다.

우리외교는 이제 주권국가로서의 생존을 확보하는 것 뿐 아니라, 나아가 우리에게 유리한 국제적 제도와 규범을 형성하는데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동시에 지속적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국제적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활로를 개척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우리 스스로의 내부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지만, 주변 4강 상호간의 관계와 한국과 이들 강대국과의 관계도 중요한 변수가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외교에 새로운 도전이 되는 동시에 우리의 국익을 주도적으로 개척해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전과 기회를 여하히 국가발전의 호기로 활용하느냐가 바로 우리외교의 핵심적 과제라 하겠습니다.

(주변 정세전망 및 우리의 외교정책에 대한 함의)

주변 4강 가운데서 예측 가능한 장래에 가장 역동적 성장이 예상되는 나라는 중국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중국은 지난 20여년간의 개혁·개방 정책의 성과로 이미 아편전쟁이후 서방 열강으로부터 받은 수모와 상처를 씻고 서서히 자신감을 회복해가고 있으며 연간 7퍼센트 정도의 성장세를 유지한다면 20년 후에는 4조불 이상의 경제대국이 될 것입니다.

경제력의 이러한 비약적 신장과 꾸준한 군비 증강이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에 미칠 파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며 미국이 일본과의 안보동맹을 강화하고 인도와의 접근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대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중국은 선진국 대열에 진입할 때까지 향후 20-30년간은 경제발전에 전념하기 위해 평화로운 주변환경을 유지하면서 역내 무력분쟁에 개입되는 상황을 피하고자 하겠지만 날로 강성해지는 중국이 역내의 패권을 추구하는 것으로 인식될 경우 역내 해양세력과의 긴장과 마찰을 초래할 개연성은 높아질 것이며 동아시아의 안보상황은 불확실성을 더해 갈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중국은 경제적으로 중요한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는 이웃이며 양국간의 무역과 투자는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 있으므로 미국과 중국이 우호적이고 순탄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바람직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강성한 중국이 역내 평화와 안정을 위해 긍정적 역할을 수행하고 미국과 중국이 전략적 경쟁보다는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협력의 동반자가 되도록 응분의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작년의 마늘 분쟁에서 볼 수 있듯이 한·중간의 경제적 상호의존도가 증가함에 따라 양국간 통상 마찰도 필연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통상 마찰을 예방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마찰이 발생할 때 공정하고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러시아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시장 경제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혼란을 점차 수습해가고 있으나 당분간 동북아에서 정치·군사적으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할 가능성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자국의 핵심 이익에 반하는 상황의 발생을 저지할 능력은 계속 유지할 것이며,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방대한 영토와 자원, 선진 과학기술 수준 등 잠재력에 비추어 국내 개혁의 진전과 함께 동아시아의 강자로 재기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러시아는 북한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고 남북한 종단철도와 시베리아횡단철도간의 연결, 천연가스 등 시베리아 자원의 개발과 수출을 통한 경제적 실리추구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업의 성사는 남북관계 진전뿐 아니라 우리상품의 대 유럽 수송 시간과 비용의 절감과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우리의 국익에 부합되므로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은 이미 고도 성장의 한계에 도달하였고 고이즈미 내각의 야심찬 금융개혁 의지에도 불구하고 10년간의 경제침체에서 탈출할 전망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향후 상당기간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며,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추진하는 동시에 군사적 역할을 확대를 위한 자위권의 확대해석 방안과 헌법 9조의 개정 방안도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도 동맹국으로서의 비용분담 차원에서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을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일본의 군사적 역할 강화에 대한 한·미간 이해관계의 상충을 지혜롭게 해결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한반도 주변4강 중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서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에 중심적 역할을 계속 할 것이며, 동아시아에서도 10만 병력의 전진배치를 바탕으로 역내의 균형자, 정직한 중재자 및 궁극적 평화의 보장자로서 중심적 역할을 계속 수행할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 동아시아에 대해 영토적 야심을 품은 적이 없었던 점등을 고려할 때, 미국은 주변 4강 중 우리의 국가적 생존과 안전을 보장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동맹국이자 우리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파트너이기도 합니다.

남북간의 국력의 격차가 심화되고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의 기운이 도래하면서 우리 사회 일각에 한·미 동맹관계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거나 주한 미군의 주둔을 달갑지 않게 보는 시각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굳건한 한·미 동맹관계와 연합방위 태세는 남북간 평화과정을 뒷받침하는 보루가 될 뿐 아니라 통일 이후에도 역내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필수 불가결합니다.

(4강을 넘어)

한·미 동맹관계와 4강 외교가 우리의 국가적 생존을 확보하고 우리의 장래 운명을 개척하는데 근간이 되어왔고 우리가 대외적으로 관리해야 할 국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에게는 4강만 있는 것이 아니며 이들과의 양자외교만으로 챙길 수 없고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국익이 남아 있습니다.

동 유럽으로 확대일로를 걷고 있는 유럽연합은 국제정치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우리의 중요한 시장이자 협력의 동반자입니다.

경제적 사활을 대외 무역과 투자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동남아, 중남미 경제권과의 관계를 순탄하게 관리하고 발전시켜나가는 것도 중요하며, 에너지 등 우리의 경제적 사활을 좌우하는 전략물자를 공급하는 아·중동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으로도 눈을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외교부 장관에 취임한 이후 전방위 외교를 표방하고 외교부 장관으로서는 25년 만에 지난 7월 이란을 방문했고 그 후 이집트를 순방한 것은 이러한 전방위 외교의 일환이었습니다.

냉전 이후 일어나고 있는 특징적 외교현상 가운데 다자 외교의 유행이 흔히 지적되고 있습니다.

환경, 마약, 국제범죄, 군축, 인권 등 양자 차원에서 해결 할 수 없는 초국가적 문제들도 있지만 지역적 차원 혹은 범 세계적 차원에서의 공동 노력을 통해 더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현안들도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참석해야 하는 다자회의만 보더라도 10년 전에는 하나도 없었으나 이제 APEC, ASEAN+3, ASEM, 각종 UN 특별 정상회담 등 1년에도 최소한 두 세번씩이나 됩니다.

우리도 이러한 세계적 추세에 발 맞추어 다자 무대를 통해 우리의 국익을 신장하는 경험을 축적하고 외교적 know-how를 쌓아가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 지고 있습니다.

다자 무대는 특히 국제적 규범을 형성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장차 우리의 국제적 행동을 규제할 제도의 형성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우리의 국익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국제적 regime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은 국제적 agenda 결정과 논의과정에 참여하고 중요한 국제문제의 처리과정에서 이해 당사국들로부터 상의를 받는 데서 발생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하여는 국제관계를 관리할 수 있는 경험을 축적하고 지적 자원과 역량을 확충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나라가 91년에 유엔에 가입하고, 96-7년에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을 역임한 것은 소중한 경험이 되었으며 제가 이번에 유엔 총회의장을 맡게 된 것은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외교지평을 넓히고 국제문제를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능력을 한 차원 더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리라 믿습니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우리외교의 기회)

우리나라가 4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존을 확보하고 4강을 넘어 번영과 도약의 활로를 개척함에 있어 먼저 우리의 역량과 국제적 위상을 평가하고 국내외적 여건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기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경제규모를 기준으로 한 우리의 국력은 세계 12-3위로서 국제사회에서 중간국가(Middle Power)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나 주변 4강과 비교할 때는 미국의 20분지 1, 일본의 10분지 1, 중국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것이 사실입니다.

제반 여건상 우리가 4강과 경쟁할 만한 실력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지식기반 산업이 국력의 핵심요소가 되는 국제적 추세 속에서 IT산업의 경쟁력을 여하히 활용하느냐에 따라 동북아의 역내 세력균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도의 힘을 보유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작으면서도 강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또한 우리와 같은 middle power에게는 다자 무대에서 강대국과 약소국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국제적 합의를 도출하는데 건설적 역할을 수행하기에 유리한 입장에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호주, 카나다, 이태리와 같이 우리와 유사한 규모의 국력을 가진 국가들이 다자 무대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교차하고 동북아의 중심에 위치한 우리의 지정학적 여건도 제국주의 시대에는 강대국들간 세력권 확대를 위한 각축의 장이 될 수 밖에 없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었으나, 무력에 의한 영토 취득이 불필요해진 오늘날에 있어서는 역내 교통 통신의 요충으로서 막대한 전략적 이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특히 남북한간 힘의 균형도 과거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고 작년 6월의 역사적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의 평화전망은 그 어느 때보다 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냉전체제하에서는 우리는 외교력의 상당부분을 남북간 zero-sum game에 허비하여 왔으나 남북간의 화해와 평화과정의 진전은 우리의 자원을 국익의 우선순위에 따라 다방면에 걸쳐 더욱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국내 정치적 민주화는 우리에게 시장 경제와 민주주의의 국제적 대세에 동참할 길을 열어줌으로써 권위주의 시대의 외교적 부담을 덜고 인권문제 등 범 세계적 문제에 있어서도 당당한 발언권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이점들을 국익증진을 위해 여하히 활용하느냐는 앞으로 우리외교에 달려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기회에 여기 모이신 중진 언론인 여러분들께 우리 언론도 우리 내부의 문제 뿐 아니라 국제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다루어 달라는 당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언론에서 국제 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의 차이는 곧 국력의 차이라는 인식을 가지시고 동북아와 4강의 울타리를 벗어나 유엔에서 다루어지는 범 세계적 문제도 많이 다루어 주셔서 우리 국민의 시야를 넓히는데 일익을 담당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