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연설문

「21세기 전략적 사고와 신정부 외교비전」컨퍼런스 개회사(4.29)

작성일
2013-04-29 14:26:00
조회수
5125


하영선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님, 이숙종 원장님,
그리고 내외 귀빈 여러분,

“Avoid Trivia”라는 영어표현이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말고 큰 그림을 보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제가 지난 10년 동안 종종 제 자신에게 되새기는 경구입니다.

이 말은 2004년 8월 제가 워싱턴에서 주미공사를 마치고 서울로 귀임할 무렵 당시 미첼 리스 미 국무부 정책실장이 국무부에서 환송오찬시 저에게 선물로 준 머그(Mug)잔에 새겨진 글귀이기도 합니다. 리스 정책실장은 제가 귀국후 당시 청와대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정책실장으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큰 틀에서의 전략적 사고가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저에게 매일 되새기라고 조언을 해 준 것입니다.

사실 “Avoid Trivia”라는 말은 1947년 마샬 국무장관이 국무부내 정책실이라는 조직을 신설하면서 초대 정책실장으로 임명한 조지 케난에게 내려준 기본 지침이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조지 케난은 그 유명한 익명의 X Article를 통해 2차대전 이후 구소련의 위협을 예견하고 “봉쇄정책”을 입안한 외교관입니다. “봉쇄정책”은 “마샬플랜”과 함께 냉전 구도를 붕괴시키고 유럽의 재건과 부흥을 이끌어낸 미국의 대표적인 전후 외교 전략이었습니다.

외교사를 뒤돌아보면 이러한 전략적 사고가 빛을 발한 예가 수없이 많습니다. 유럽에서는 일찍이 프랑스의 슈망 외상의 제의로 1951년 ECSC(유럽석탄철강공동체)가 발족되어 오늘날 유럽연합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중동에서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이후 중동 평화협상의 틀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외교사에서도 전략적 사고를 통해 외교의 지평을 넓히고 국익을 확보한 뿌듯한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반, 우리는 냉전구도의 종식과 이에 따른 세계 질서 재편 움직임에 전략적으로 대응하여 “북방외교”를 펼치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창설을 주도하였고 UN가입을 실현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오늘날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동구권 여러 나라들이 우리의 주요 협력 파트너들이 되었고, APEC은 아태지역내 대표적인 포괄적 협의체로 성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외교장관으로 취임하면서 취임사를 통해 후배 직원들에게 현재와 같이 유동적인 국제정세와 한반도 안보상황 속에서, 또한 분단의 시대를 살고 있는 외교관들로서, 특히 이러한 전략적 사고와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배양하도록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처한 엄중한 상황속에서, 위기를 안정적으로 관리하여 기회로 전환시키고, 한반도내 지속가능한 평화를 구축하여 통일의 기반을 구축해 나가기 위해서는 다가오는 폭풍우와 격랑을 멀리서 내다볼 수 있는 망원경과 같은 관찰력과 이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합니다. 특히, 우리와 같이 강대국에 둘러싸인 나라에게 있어 전략적 사고능력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합니다.

내외 귀빈 여러분,

지난 2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은 대한민국 그리고 동북아 역사상 최초의 여성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께서는 취임사를 통해, 국민 행복과 함께, 행복한 한반도, 지구촌 행복시대 기여라는 비전을 제시하였습니다. 그간 국가안보, 국제평화라는 표어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행복”이라는 개념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러한 신정부의 비전은 한국의 독특한 경험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 한국은 외세의 침략, 분단과 전쟁, 남북대결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거치면서도 전후 짧은 기간내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괄목할 성장의 결실과 국가적 성취가 국민 개개인의 행복으로 충분히 구현되지 못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국민 행복에 대한 비전은 이와 같은 성찰을 기반으로 사람중심, 국민중심으로 사고를 전환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안보를 강조하는 세계적 패러다임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국민의 행복을 넘어 한반도 구성원 전체의 행복과 더 나아가 지구촌의 행복을 함께 추구함으로써, 공생발전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한반도에서 지속 가능한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의 경제 발전 그리고 국력 신장과 함께 국제 사회에서의 역할과 책임도 증대시켜야 합니다. 글로벌 어젠다 해결에도 기여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내외 귀빈 여러분,

이제 갓 출범한 박근혜 정부를 둘러싸고 있는 현재의 외교안보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 엄중합니다. 동시다발적인 도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특히 향후 수년간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전개될 변화는 우리의 명운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신정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러한 도전에 대응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평화를 확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강력한 억지력에 입각하여 튼튼한 안보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평화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대외정책의 기조로서 “신뢰외교(trustpolitik)”를 제시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남북간 오랜 갈등에 기인한 악순환을 종식시키고, 대립으로 점철된 동북아 질서를 새로운 협력의 시대로 바꿔 나가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냉전의 잔재와 아시아 패러독스, 즉 안보와 경제관계의 부조화가 존재하는 한반도와 동북아에 “신뢰외교”를 적용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의아해 하면서, 정치적 현실주의(realpolitik)야 말로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상황의 심각성에 비추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신뢰외교”는 편협한 주관주의나 정치적 낭만주의가 결코 아니며, 오히려 역사적 경험과 한반도와 동북아의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위에 탄생한 것이라는 점을 이 기회를 빌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또한 한반도 문제와 동북아 문제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우리의 지난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독일 통일전 동서독 문제가 주변 강대국들과의 관계, 더 나아가 유럽의 평화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와 중동 문제가 서로 분리되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서로 영향을 주는 하나의 큰 틀 속에서 조명해야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또한, 국가간의 관계나 공동체의 형성 과정에 있어서 지속가능한 협력은 항상 신뢰의 수준과 같이했다는 것이 역사의 경험입니다. 신뢰는 협력을 위한 자산(asset)이고, 공공의 인프라이며, 진정한 평화를 이루어 내는 불가결의 요건입니다. 신뢰 없는 평화는 깨지기 쉬운 거짓(bogus) 평화에 불과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뢰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오랜 과정(process)과 일관성이 필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의 “신뢰외교”는 정책 수단을 포함한 외교 전략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신뢰외교”를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에서의 지속가능한 평화와 협력을 구축하려는 것이 바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인 것입니다.

내외 귀빈 여러분,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확고한 안보를 토대로 남・북한간 신뢰를 쌓아 관계를 정상화하고 지속가능한 평화를 정착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한반도 주민 모두가 행복한 통일 시대를 열겠다는 구상입니다.

그러나, 신뢰를 구축하는 것은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집을 짓는 것과 같이 시간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또한, 손뼉도 마주 쳐야 소리가 난다는 옛말처럼, 신뢰구축은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북한이 스스로 진정한 변화의 방향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북한이 변화하지 않을 수 없도록 국제사회가 여건을 만들어 나가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지난 수개월간,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 발사부터 시작하여 핵실험, 북한과 한국에 있는 외교관들과 외국인들에 대한 위협을 넘어, 최근 개성공단 잠정 폐쇄조치에 이르기까지 위협과 도발의 수위를 계속 높여 왔습니다. 일각에서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위기에 처한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가 있는데, 이것은 커다란 오해입니다. 그것은 신뢰프로세스가 강력한 억지에 기반한 것으로서 ‘강해야 할 때는 강하고 유연해야 할 때는 유연한’ 정책이라는 점을 간과하였기 때문입니다.

한국 정부는 공고한 안보 태세를 유지하는 가운데, 개성 공단 문제에 대해서도 북한의 약속 이행과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촉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의 안전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국가의 책무에 충실한다는 원칙에 따라 고뇌 끝에 금번 우리 근로자들의 전원귀환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의 문은 여전히 열어두고 있습니다.

신정부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기조하에 북한의 변화 유도를 위해 강력한 대북 압박과 함께 강력한 설득 노력을 지속할 것입니다. 미국・중국 등 핵심 국가들을 포함한 국제사회와 함께 북한에 대한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하고 전략적 소통도 강화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이 올바른 방향으로의 전략적 결단을 내리지 않고 낡은 playbook에 집착한다면, 북한의 고립은 더욱 심화되고 핵보유와 경제발전 병행이라는 희망은 허황된 ‘일장춘몽’으로 끝날 것입니다.

내외 귀빈 여러분,

잘 알고 계시다시피, 최근 동북아 지역에는 과거사 문제 등으로 역내 국가간 불신이 심화되고 일각에서는 영토 갈등으로 인해 자칫 군사적인 충돌 가능성마저 우려되는 상황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부 역내 정치 지도자들의 역사퇴행적인 언행으로 역내 협력의 분위기가 급속히 냉각되고 있습니다.

경제 성장과 역내 협력의 진전을 통해 “동북아 시대의 도래”를 꿈꾸던 이 지역에 갑자기 한파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간 역내에 잠재해 있던 부정적인 요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제기되면서 상황의 심각성이 증폭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내 경제발전과 상호의존성 확대 등에도 불구하고 정치・안보 협력이 초보적 수준에 머물고 있는 역설적 현상, 즉 “아시아 패러독스”에 기인하는 측면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동북아의 불신과 대결의 구도를 미래를 위한 신뢰와 협력의 구도로 바꾸어 나가려는 것이 바로 박근혜 정부의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입니다. 작지만 의미있는 일부터 시작하여, 협력의 습관과 환경을 만들어 내고, 신뢰를 축적해 나감으로써 “평화롭고 협력적이며 책임있는” 동북아 시대를 위한 여정을 시작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의 진전은 큰 틀에서 북핵 문제 해결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며,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화해와 공영의 새시대를 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반도의 지속 가능한 평화 정착을 위해서는 이에 유리한 동북아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고, 한반도 평화 정착은 역으로 동북아 평화와 협력 추진에도 도움이 되는 선순환적 구조를 이루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동북아 시대를 향한 여행은 멀고 힘들며, 예기치 않은 장애물이 놓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동북아에는 이미 새로운 질서를 위한 공동의 경험이 있습니다. 한중일 3국 협력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중일 3국은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2008년부터 한중일 별도 정상회의를 매년 개최해 왔습니다. 2011년에는 서울에 3국 협력 사무국을 설립하여 3국 협력 제도화의 기틀을 마련한 바가 있습니다. 작년에는 한중일 투자보장협정을 체결하였고, 한중일 FTA 협상도 개시되었습니다. 금년도 한중일 정상회담이 당초 예상보다는 지연되고 있습니다만, 금년중 너무 늦지 않게 서울에서 개최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 동북아 정세의 흐름속에는 역내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들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은 아프간 및 이라크 문제에서 벗어나 아태지역으로 관심의 축을 옮기는 소위 아시아 “재균형(Rebalancing)”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새로운 지도부가 들어서면서, 신형대국의 기치하에 미․중 관계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는 아태 지역 중시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 및 유라시아 정책과 궤를 같이 합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는 동북아내 핵심 국가들의 중요한 전략적 판단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번 주말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방문은 지난 60년간의 한미동맹의 성과를 점검하고, 새로운 60년을 향한 비전과 전략을 논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또한, 금년 중 예상되는 중국을 포함한 주요국 방문을 통해 우리 외교의 전략적 파트너들과 미래를 향한 공동의 비전을 발표하게 될 것입니다.

내외 귀빈 여러분,

지난 수십년간 한국의 외교지평은 주변 주요국을 넘어 아시아 대양주, 유라시아에서 미주, 아프리카 그리고 북극에 이르기까지 전세계를 아우를 정도로 확장되어 왔습니다.

한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으로 활동 중이며, 우리 군은 레바논, 아프간, 수단 등 세계 전역에 걸쳐 다양한 평화유지 및 지방재건 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PKO는 어느 나라도 따라오기 힘든 민군관계(civil-military relations)의 새로운 모델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은 2010년 G20 정상회의, 2011년 원조개발효과성에 관한 고위급총회,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를 개최하고, 기후변화, 해적퇴치, 테러리즘, 재난구호 등 국제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도전을 극복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에 폭넓게 동참하고 있습니다. 금년 10월에는 서울에서 전세계 100여개 국이 참여하는 ‘사이버 스페이스 세계총회’를 제가 주재할 예정입니다.

특히 한국형 성장모델, 즉 ‘할 수 있다’ 정신(can-do spirit)과 ‘맞춤형’ 원조라는 특징을 갖춘 개발 협력 모델을 세계 각지에서 함양해 나가고자 합니다.

이는 한국 고유의 성장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우리는 수요국 자신의 강력한 내적 동기(internal motivation)와 수원국의 필요에 대한 공여국의 배려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몸소 배우고 깨달아 왔으며, 이제 우리의 경험과 교훈을 국제사회와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한국이 국제사회의 신뢰받는 국가로서 다양한 글로벌 어젠다에 있어 합당한 책임과 역할을 다해 나가고, 보다 행복하고 풍요로운 지구촌을 건설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이제 우리도 국제사회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 기여하려는 것입니다.

내외 귀빈 여러분,

국가의 미래를 형성해 나가는데 있어서 기존 통념의 틀을 벗어나 창의적이고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외교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외교부가 금번 “21세기 전략적 사고와 신정부 외교비전” 국제회의를 동아시아연구원과 공동 주최하게 된 것은 그와 같은 인식과 필요성에 따른 것이기도 합니다.

이번 회의를 통해 21세기 한국 외교의 환경과 나아갈 방향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과 비전이 제시됨으로써, 국민 행복, 한반도 행복, 지구촌 행복을 추구하는 한국정부에게 시의적절하고 유용한 기회가 되리라 확신하며, 금번 회의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