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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

국내언론

[인터뷰]'협상장의 검투사'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부서명
작성자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작성일
2009-09-21
조회수
1194

[최보식이 만난 사람] '협상장의 검투사'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너 살고 나 죽고, 나 살고 너 죽으면 협상 안돼… 둘다 살아야"
사무라이·검투사 등 별명… 책임있게 생겼다는 말 들어… 젊었을 땐 날카롭다고들 해
성동격서 같은 전략보다 우선 신뢰를 지키는 게 협상할 때의 기본
출세 한번 해보자며 비비는 건 체질에 안 맞아 '내 배짱대로 살자' 주의
김종훈(57) 통상교섭본부장을 마주하니 날카로운 눈매와 큰 입만 들어왔다.


―자기 얼굴에 만족하는 편인가요?

"이 나이면 미남을 따질 때는 지났고, '남자 얼굴로는 책임 있게 생겼다'고 듣죠. 그 정도면 좋은 평가죠."

―젊었을 때 얼굴 그대로입니까?

"그때는 '날카롭다, 못되게 생겼다'는 소릴 들었죠."

―지금은 그런 말을 안 듣는다는 뜻입니까?

"지금도 가끔 듣죠. '일본 사무라이'니 '검투사' 같다니, 그런 별명은 썩…."

―한·미 FTA 협상 때 자신의 입으로 웬디 커틀러 미국측 수석대표에게 "우리는 글래디에이터(검투사)"라고 말했지요.

"서울에서 협상할 때 웬디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전생에 무슨 죄가 많은지 이런 어려운 통상 협상 일을 하게 됐나'라고 푸념을 해요. 그래서 '내가 가르쳐줄까. 검투사일 거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라고 했죠. 함께 웃었어요. 사실 매스컴에 보도 안 된 그다음이 더 중요합니다. 마주 앉은 뒤 '하지만 당신과 나는 죽기 살기로 하면 안 된다. 너 살고 나 죽고 나 살고 너 죽으면 일이 될 수 없다. 둘 다 살아야 한다'고 했죠. 상대를 죽이는 것은 잘하는 협상이 아니죠."

그와 서서 인사할 때는 키가 비슷했는데, 앉아서 얘기할 때는 그가 훨씬 커 보였다. 한·미 FTA, 한·칠레 FTA, 한·EU FTA, 한·인도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을 이뤄낸 협상은 앉아서 담판 짓는 것이니, 협상전문가란 '앉아서 거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협상은 결국 상대를 설득하는 기술인데, 한비자(韓非子)의 설난(說難)편에는 상대를 설득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어떻게 상대를 설득할 수 있지요?

"상대를 설득하려면 자기도 설득당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남을 설득하겠다고 하면 실패하게 마련이죠. 내가 상대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면, 나도 상대편을 어느 정도까지 인정해줘야 합니다. 빤히 보이는 수(手)로 턱도 없는 것을 주장하는 상대라면 두 번 다시 만나기가 싫지요."

―협상에서도 고도의 기술과 전략이 들어가는 거죠?

"흔히 '성동격서(聲東擊西)'라 합니다. 저쪽을 취하기 위해 상대편 관심을 이쪽으로 돌릴 때가 있죠. 또 내가 필요한 것은 3인데, 처음부터 3을 불렀다가는 1도 못 얻으니, 처음에 다섯을 내놓으라고 해 나중에 양보하는 척 3을 받지요. 이를 저는 '청오구삼(請五求三)'이라 부릅니다. 물론 섣불리 하면 상대편이 금방 눈치를 채죠. 협상은 여러 가지 기교·기술·전략도 있지만, 우선 신뢰를 지키는 게 기본입니다. 협상하다 보면 인내의 한계까지 와서 고함지르거나 얼굴을 붉히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도 하죠. 그러나 그게 연극인지, 진정성이 있는지 상대는 다 느끼죠. 연극을 할 수도 있죠. 다만 그런 횟수가 잦아지면 신뢰를 잃게 되죠."

―작년 4월 미국에서 쇠고기 추가협상 도중 "귀국하겠다"며 협상장을 떠났지요. 그건 협상 전략에 속합니까?

"연극으로 했으면 상대편이 연극인지 압니다. 국내 상황도 절박했고 상대편은 쉽게 설득이 안 됐어요. 협상장을 떠나면서 배석한 대표단 5명에게 '따라나오라'고 했죠. 제 좌절의 표시였죠. 그때 상대편도 '저 정도면 연극이 아니다. 이게 한국측의 데드라인이구나' 하고 느끼지 않았을까요."

―정말 빈손으로 귀국할 생각이었습니까?

"사정이 어떻든 상업적 이익은 미국측에 있거든요. 저쪽은 팔겠다는 입장이니까요. 협상으로 시간이 갈수록 그만큼 쇠고기를 팔지 못하면 손해는 저쪽에 있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 미국측이 기회비용을 계산한다면 협상을 빨리 맺는 쪽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러면 이쯤 보따리를 싸도 좋겠다는 판단이 섰어요."

―미국측이 다시 불러 협상이 진전됐지만 그쪽 입장은 어땠나요?

"자기들이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으로는 우리가 이해 안 됐죠. 그래서 서울광장의 촛불시위 사진을 보여주며, 광우병 전염으로 수돗물도 못 마시고 생리대도 못 쓰겠다고 한다, '이걸 과학으로 한번 설명해보라'고 했죠. 현안은 이성을 요구하지만 우리 국민이 반응한 것은 감성이었으니…"

―당초 서울서 떠나올 때 어떤 훈령(訓令)을 받았습니까?

"특별히 주어진 훈령이 없었어요. 정국이 소용돌이 속에 있어 누가 책임 있게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어요. 정말 스스로 가늠해야 했지요."

―추가협상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30개월 미만과 30개월 이상으로 나눠 2단계 개방'을 얻어냈지만, 촛불시위를 진정시키지는 못했지요?

"귀국 직후 청문회에서 '혐오스러운 물질(눈·두개골)은 우리가 주문하지 않으면 갖고 오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다. 우리 업체들도 수입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보고했지요. 그러자 '생색내지 마라. 어차피 안 들어오는데 그걸 합의라고 내놓느냐'고 공격했어요. 참 답답한 게 '처음부터 안 들어올 줄 알았다면 왜 그런 게 문제 된다고 눈도 들어오고 골도 들어온다며 국민의 가슴에 불을 질렀느냐'는 거죠. 무얼 협상해와도 '이 정도면 됐다'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무슨 일을 하든 100%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죠.

"(웃음) 그분들도 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랬겠죠."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서울 도심은 석달 가까이 촛불시위로 무법천지가 됐지요. 그때 감상이 어떠했습니까?

"쇠고기 수입으로 우리 축산 농가의 피해에 대해 고민을 했지, '먹으면 죽는다'는 식으로 제기될지 진짜 생각 못했습니다. 의외였지요. 국제적 기준이 논란이 될 줄도 예상 못 했지요. 그럴 줄 알았다면 정부가 좀 더 소통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렇게 못 한 것은 '먹으면 죽을 수 있다'는 쪽으로는 전혀 착안을 못한 겁니다."

―"지난 정권에서 30개월 이상 쇠고기 개방과 관련해 알리려고 했지만 대선·총선 등 선거가 계속돼 쇠고기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했다"고 말한 적이 있지요?

"쇠고기만 그런 게 아니라, 많은 통상문제가 정치적으로 '비인기 종목'입니다. 통상 관련 장관들이 한자리에 모일 경우 해당 나라에 선거 일정이 있으면 '타이밍이 안 좋다'고 합니다. 경제 이론으로는 개방하고 교역하는 게 이익이지요. 그러나 피해 보는 분야도 생깁니다. 이쪽 목소리가 크죠. 정치권은 목소리 큰 쪽에 부담을 느끼죠.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면 전체 내용은 왜곡되죠."

―촛불시위 이후로 국민을 선동한 MBC는 안 본다고 했다면서요. 요즘도 안 봅니까?

"예. 볼 시간이 없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부담이 안 됩니까?

"안 보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본부장에 대한 언론의 평을 보니 '치밀함과 꼼꼼함'도 있고, '화끈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해버리는 스타일'도 있는데, 실제 어느 쪽인가요?

"저는 할 말을 다 하는 편이죠. 안에 담고는 잘 있지 못합니다."

―할 말 다하고 협상이 됩니까?

"협상할 때는 다르죠. 협상이니까요."

―협상 전날 밤은 어떻게 보냅니까?

"뭐, 잘 잡니다. 협상에서 내가 꼭 하나 남겨야겠다는 생각은 안 합니다. 재작년 미국과의 마지막 FTA 협상을 할 때 집을 나오면서 '협상이 실패할 수도 있다. 생즉사 사즉생(生則死 死則生)이다'고 말했어요."

―협상이 생각대로 안 풀리면 어떻게 합니까?

"속이 타고 담배를 많이 피우죠. 대부분 마감시간에 쫓겨야 타결되는 경우가 많아요. 1994년 말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때 데드라인은 밤 12시였어요. 그때까지 타결이 안 되자, 협상장 벽시계를 12시 5분 전에 맞춰놓고 배터리를 빼버리고 협상해 타결됐어요. 재작년 하얏트호텔에서 FTA 협상을 할 때는 협상장에 창문이 없어 시계가 11시인데 이게 밤인지 낮인지 구분이 안 됐어요. 취재진이 포진한 복도에 나가서야 알았습니다. 밥 먹으러 나가기도 귀찮아 김밥이나 컵라면을 먹었지요."
―일단 체력싸움이겠군요.

"미국에서 협상할 때는 밤낮이 완전히 바뀌죠. 낮에 협상하고 밤에 좀 쉬려면, 서울은 아침이어서 보고해야 합니다. 그러면 미국이 다시 아침 되고 협상에 나섭니다. 협상할 때는 '깡'이 필요하지요."

―정부 훈령(訓令)으로 협상의 가이드라인을 정해놓지요. 실제 협상장에서 얼마나 재량을 갖습니까?

"협상수석대표 뒤에는 협상단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뒤통수가 간지러워 정부 훈령 이상의 얘기를 못 합니다. 훈령으로는 도저히 협상이 안 된다, 좀 까놓고 얘기를 해야 합니다. 수석대표끼리 단둘이 만나죠. '우리 사이에는 신뢰를 지켜줘야 한다. 가설적으로 내가 이걸 받아주면 너는 이걸 해줄 수 있나'고 하면, 상대편도 '그건 안 되겠고 대신 이 정도까지는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주고받아요. 그러면 대충 그림이 나옵니다."

―모든 일은 막후(幕後)에서 이뤄지는 거군요.

"책임 있는 사람이 신뢰를 바탕으로 계속 좁혀갑니다. '엔드 게임(end game: 최종 조율 게임)'입니다. 논리적인 것을 뛰어넘는 과정도 들어가죠. 가령 '그걸 받았더니 모 기업이 죽겠다고 한다. 그 기업의 로비를 받는 정치인이 매우 센 사람이다. 도저히 뜻을 그르칠 수 없다. 조금만 더 그쪽에서 양보해라'는 식이지요. 이게 지나야 협상이 타결되는 겁니다."

―통상전문가로 걷게 된 것이 1994년 주미대사관 경제참사관 시절 미국산 냉동육 유통기한협상 등에 참가한 게 계기가 됐지요?

"그 뒤로 그렇게 흘러가더라고요. 그때 특별히 잘못한 게 없었다고 위에서 본 거겠죠."

―당초 외무고시에 붙었을 때 이런 길을 생각했나요?

"그런 생각은 없었고요."

―아직은 외교의 주류가 정치 분야인데 주재국 대사도 한번 못 지냈고, 본인으로서는 내심 좀 섭섭할 때가 없었습니까?

"여기에 대한 답이 될지는 모르나, '출세해보자'며 어디 가서 비비고 굽히는 건, 저와 잘 안 맞습니다. 못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내 배짱대로 살자'는 쪽이지요."

―1998년 스위스 제네바 공사 시절 '산 너머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 패러글라이딩을 시작한 뒤로 익스트림 스포츠(extreme sports)의 마니아가 됐다고 들었습니다.

"여러 동기가 있지만, 우선 '남들이 하는데 내가 못하겠느냐. 같은 사람인데' 하는 마음이었지요. 장비만 있으면 돈이 별로 안 들어요. 바람 탄다고 바람값 내라고 하지도 않고요. 인생 살면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가면 진짜 아깝죠."

―살면서 어디에 가치를 둡니까?

"돈은 아닌 것 같고, 참 어려운 질문이네요. 자기 스스로 어떤 보람을 느꼈느냐, 그런 쪽이겠죠. 남들한테 평가를 받는다기보다요."

―군살이 없는 얼굴만 보면 절제된 느낌을 줍니다.

"성질이 급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요. 고치려고 노력을 많이 했지만, 요즘도 직원들과 이야기하다가 버럭 화를 내요. 남자가 화낼 수도 있죠. 뭐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부하 직원끼리는 저를 '버럭 김'이라고 한대요."


최보식 선임기자 congchi@chosun.com

출처  2009/9/21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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