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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

국내언론

[인터뷰]“우리 젊은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 주려면 개방 절대적”

부서명
작성자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
작성일
2007-04-10
조회수
911

 

“우리 젊은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 주려면 개방 절대적”

 

 

韓·美 FTA 진두지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 인터뷰

 

 

9일 서울 세종로 통상교섭본부장 접견실에서 만난 김현종(金鉉宗·48) 통상교섭본부장은 감기 몸살에 목도 약간 잠겨 있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에 고무돼 있을 법도 한데, 평소의 냉정한 자세를 풀지 않는다. 표현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고르고, 1시간의 인터뷰 동안 거의 웃지도 않았다. 그는 EU(유럽연합)와 중국은 물론, 러시아가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는 대로 러시아와도 FTA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우선 그를 포함한 협상팀에 쏟아진 찬사부터 물어보았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9일 본지 인터뷰에서“아세안과의 FTA처럼 농업의 10%만 보호를 받으면 한·중 FTA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웬디 커틀러 미측 수석대표가 한국 협상팀을 ‘최강팀’이라고 극찬했다는데, 많이 얻어냈다는 만족감에서 나온 립서비스(말만의 칭찬)는 아닐까.

 

“협상 결과는 100점은 아니고 중간 이상 정도로 보면 딱 적당한 것 같다. 김종훈·커틀러 양측 대표가 서로에게 코멘트 한 것은 정말 잘했다기보다 협상 결과가 (양측 이익에) 균형이 이뤄진 결과라는 뜻에서 한 얘기라고 본다.”

 

 

―서민들로선 한·미 FTA가 가져다 줄 혜택이 실감나지 않는다. 예컨대 동네 수퍼마켓 주인이 ‘나에게 무엇이 좋아지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겠는가.

 

“소비자 후생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중간층의 소비자들에겐 선택권도 많아지고 물건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게 된다. 경쟁을 통해 서비스를 향상시킬 수 있는 점도 혜택 중 하나다.”

 

 

왜 멀리 떨어진 미국부터 FTA 했나   

먼 나라와 친교, 가까운 나라 공략 손자병법에도 나와있지 않나

 

 

―FTA를 왜 멀리 떨어진 미국부터 했느냐고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손자병법을 읽은 것과 안 읽은 것의 차이다. 원교근공(遠交近攻·먼 나라와 친교를 맺어 가까운 곳을 공격한다)이라고 하지 않나. 미국과 유럽·러시아·동남아 사람들은 이 지역 패권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런 면에서 우리와 공통점이 있고, 이들과는 FTA를 더 편하게 추진할 수 있다. FTA는 단순히 주판알만 튕기기보다 우리와의 역사적 관계 등 전략적인 것을 모두 감안해서 추진해야 한다.”

 

김 본부장은 “역사에 대해서 확실하게 바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걸 모르고 FTA 전략을 세우는 것은 난센스”라고 말했다.

 

 

―김 본부장은 외국에서 공부해 우리 역사는 잘 모를 것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내가 가장 많이 보는 게 세계지도와 역사책이다. 언제 한번 제 서재를 보여줘야겠다. 제가 (한국에) 오자마자 읽은 것이 한·미·일 역사책이다. 케임브리지 히스토리(Cambridge History)에 명나라와 우리 역사에 대해 잘 기록돼 있던데, 조선시대에 우리가 잘했던 것, 못했던 것을 다 읽었다. 이준 열사에 대해서도 관련 책들을 읽었다. 개항 시절 조선의 공사(公使)가 일본에 갔을 때 썼던 100페이지 메모도 갖고 있다. 그때 우리의 애로사항들, 이런 것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FTA 반대론자들은 김 본부장이 대부분 교육을 외국에서 받았기 때문에 국가관이 약하다고 평가한다. 김 본부장이 생각하는 국가관은 무엇인가.

 

“저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멋쩍은 웃음) 국익이 중요하다. 국익을 위해선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 내가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면 100만원을 벌 수 있는 것도, 예컨대 90만원만 벌겠다고 마음먹고 즐기며 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익에 관한 한 그게(타협을 의미) 안 된다.”

 

 

―유년·청소년 시절 줄곧 한국을 떠나 있었는데, 한국의 서민과 민중·기층민의 정서를 이해해 국익에 반영시킬 수 있나.

 

“이번에 협상하면서 제일 가슴 아팠던 것이 농업이다. 우리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민감 품목에 대해 예외나 현행관세 유지를 얻어내고 세이프가드 장치도 마련했지만 그 분야에 대해선 가슴이 아팠다. 내가 국회에서 말했듯이 국내 대책 및 보완책을 확실히 마련해야 한다.”

 

 

쌀을 포기 못하는 이유는

전쟁 경험있는 우리에겐  식량 안보차원에서 중요

 

 

―중국과 FTA를 맺으면 국내 농업에 가공할 파괴력이 예상된다. 중국은 자기들이 먹지 않는 자포니카(우리가 먹는 중단립종) 쌀을 동북3성에서 재배할 정도로 한국 농산물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농업은 보호해야 한다. 그게 안 되면 (중국과 FTA를) 안 하는 것이다. 매번 FTA를 할 때마다 쌀은 예외로 지켜왔다. 중국도 농산물의 민감성을 잘 알고 있다. 중국에 대해서도 이 룰(10% 예외)만 적용받으면 민감한 농산물을 보호할 수 있다.”

 

 

―국익이 최우선 기준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쌀을 포기하고 다른 분야를 얻는 게 국익에 더 도움이 되지 않나.

 

“국민 정서 문제다. 농사 짓는 분의 상당수가 쌀 농사를 짓고 있다. 식량 안보차원에서도 쌀이 중요하다. 그래서 양보하지 못한다.

 

김 본부장은 쌀을 식량 안보 차원에서 보는 근거로 “우리는 전쟁경험이 있고 북한이 아직 존재하고 있다”고 말했다.

 

 

―FTA로 개방과 경쟁을 강조하면서도 교육의 ‘3불(不) 정책’이나 지역 균형발전 전략 등을 보면 이와 상충된다는 지적이 나오는데.

 

“그건 교육부 장관에게 물어보셔야죠. 전 한국에서 교육도 거의 받지 않았는데….”

 

 

―세계무역기구(WTO)에 근무할 때 무엇을 배웠나.

 

“그때 보니까 우리나라는 참 가능성 있는 나라더라. 한국 젊은이들의 능력과 창조력은 어디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워너브러더스(미국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사)의 애니메이션은 한국 만화가가 다 그린다. 한국 만화가의 창조성을 못 따라간다고 한다. 일본의 정부조달 사업에도 우리의 IT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개방이 중요하다.”

 

 

金본부장, 우리 역사 잘 모른다는데…

세계지도·역사책 가장 애독 언제 한번 서재 보여드리죠  

 

 

―통상전문가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제일의 덕목이라면.

 

“협상을 언제든지 깰 수 있다는 자세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렸고, 많이 투자했더라도 조건이 안 맞고 내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깰 수 있어야 한다.”

 

 

―협상팀으로서는 협상을 깨는 부담이 상당할 것 같은데.

 

“부담은 상당하다. 하지만 언제든지 중단할 수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일본과 (FTA 협상 때) 그렇게 하지 않았나. 1년 넘게 협상을 했지만 일본이 당초 약속(농산물시장 90% 개방)을 지키지 않았다. 협상에 임하는 접근 방법을 보니까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중단시켰다.”

 

 

―공직자 재산공개 때 보니, 재산이 10억원이 채 안 됐다. 국제 통상 변호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재산을 많이 모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홍익대 교수로 재직할 당시 받는 게 적었고…, (WTO 수석고문변호사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생활할 때에는 물가가 워낙 비싸서 세이빙(저축)이 안 됐다. 그리고 공직 생활을 4년간 했는데 적지 않은 월급이었지만 많이 모으진 못했다.”

 

그는 미국의 로펌(법률회사)에 들어간 이듬해인 1986년 귀국해 석사 장교로 6개월간 군 복무를 했다. 아무리 6개월 단기 복무라지만, 외국 생활에 익숙한 그로선 단체생활이나 기합 등이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한민국 남자라면 모두 다녀오는 곳 아닌가.”

 

전방 근무는 어디서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라고 대답했다. 기자가 복무한 곳과 같은 곳이었다.

 

 

 

 

대담:박정훈 경제부장

정리=홍원상 기자

출처 : 조선일보 2007/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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